왜 이 책을 읽게 됐나
어릴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세상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별은 왜 빛나고, 물은 왜 아래로 흐르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그 호기심이 중고등학교 시절 물리 경시대회 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대학 진로를 선택할 때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이론물리는 진정한 재능의 영역입니다. 저는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되기보다, 이론이 만들어낸 것들을 활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공대로 왔습니다.
그렇다고 순수한 호기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양자역학에 관해서는 늘 막혀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건 두 종류뿐이었거든요.
하나는 너무 추상적인 비유들.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다”는 식의 설명은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게 만듭니다. 다른 하나는 선수과목이 어디서부터인지도 모를 수식들. 브라-켓 표기법, 해밀토니안, 고유값 문제… 첫 페이지에서 포기했습니다.
레너드 서스킨드의 『물리의 정석: 양자역학 편』은 그 정확한 중간 지점에 있었습니다.
수학이 있되, 벽은 아닌 책
저자는 수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의 뼈대는 결국 수학으로 기술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반물리와 공대 졸업 수준의 수학, 즉 미적분과 선형대수 정도가 있다면 따라갈 수 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모든 수식 유도를 완벽하게 따라가며 읽지는 못했습니다. 연습문제까지 전부 풀며 소화하려면 1~2년은 족히 걸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주는 건 분명합니다. 양자역학의 근본 개념 구조가 수학적으로 어떻게 생겼는지를, 적절한 깊이로 보여줍니다.
이 글에서도 그 “적절한 깊이”가 어떤 느낌인지 전해지도록, 책에 나오는 수준의 수식을 몇 개만 곁들여 보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생겼다고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멈추게 됐습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바에 따르면, 세상은 기본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규칙은 양자역학으로 기술됩니다. 너무 당연하게 들리지만, 이 문장이 실제로 무슨 의미인지를 수식과 함께 마주하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입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세 가지입니다.
파동함수와 중첩
책은 스핀이라는 가장 단순한 양자계에서 출발합니다. 위(up)와 아래(down), 딱 두 가지 기본 상태 , 만 있는 세계입니다. 양자역학의 첫 번째 충격은, 입자가 이 둘 중 하나에 있는 게 아니라 둘의 선형 중첩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측정이라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값으로 확정되는데, 각 결과가 나올 확률은 그 앞에 붙은 계수(확률 진폭)의 절댓값 제곱입니다.
왜 하필 제곱일까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이 물음은 남아 있습니다. 세상은 1승도 3승도 아닌 2승으로 돌아갑니다.
힐베르트 복소공간
이 모든 것을 복소 힐베르트 공간에서 기술하면 딱 들어맞는다는 사실이 신기했습니다. 위의 , 는 실수가 아니라 복소수여야 하고, 상태는 로 정규화된 복소 벡터입니다. 관측 가능한 물리량은 그 공간 위의 연산자이고, 측정값은 그 연산자의 고유값입니다.
리만기하학이 일반상대성이론보다 먼저 존재했고, 힐베르트 공간이 양자역학보다 먼저 있었듯, 수학이 세상을 기술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수학으로 생긴 것 같다는 느낌. 이 “터무니없는 유효성”은 책을 덮고 나서도 한동안 따라붙었습니다.
양자 얽힘의 수학적 민낯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이겁니다. 양자 얽힘은 워낙 기이한 현상이라, 엄청나게 고차원적인 수학의 산물일 거라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학적 본질은 중학교 때 배우는 인수분해, 즉 두 항의 곱으로 표현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됩니다.
스핀 두 개로 이루어진 계의 일반적인 상태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 상태가 “입자 A의 상태 ⊗ 입자 B의 상태”라는 곱으로 인수분해되면, 두 입자는 각자 자기 상태를 가진 평범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어떤 상태는 어떻게 해도 인수분해가 안 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싱글릿 상태입니다.
곱으로 풀어 쓸 수 있으려면 가 성립해야 하는데, 싱글릿은 이면서 이라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텐서곱이 분리되지 않는 상태, 그게 곧 얽힘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더 복잡하지만 뼈대는 정말로 이렇습니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현상의 씨앗이 이렇게 단순하다니.
이건 공준이지 정리가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 같은 패턴이 눈에 걸렸습니다. 예를 들어 상태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지배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은,
무언가로부터 유도된 게 아니라 추측된 공준입니다. 유니타리성(확률의 보존)도 증명된 정리가 아니라 공리입니다. 양자역학의 화려한 결과들 밑에는 “왜 이게 성립하는가”를 묻지 않고 그냥 출발점으로 삼는 가정들이 깔려 있습니다.
이게 실망스러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책을 통해 이해했습니다. 물리학은 원래 그렇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의 법칙은 더 이상 왜냐고 묻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가정 위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설명하고 예측할 수 있느냐가 이론의 힘입니다. 양자역학은 그 기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이론입니다.
신비화에 한마디
책 바깥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양자역학 관련 대중 콘텐츠 중에는 “관측이 곧 의식의 개입”이라거나 “양자 무작위성이 자유의지를 증명한다”는 식의 비약이 많습니다. 이 책은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관측에 의식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어떤 물리적 상호작용이든 측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수학 구조 자체가 담담히 보여줍니다. 양자역학을 신비주의로 가져가려는 시도에 이 책이 가장 좋은 예방약입니다.
여전히 남는 질문들
그래도 끝에 남는 물음들이 있습니다. 왜 세계는 양자적인가. 왜 하필 진폭의 제곱인가. 중력은 어떻게 양자역학과 통합되는가. 이 질문들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나고, 아마 지금의 물리학도 완전히 대답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게 물리학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일 겁니다.
누구에게 권하고 싶은가
공대를 나왔거나 물리 베이스가 어느 정도 있고, 양자역학이 궁금한데 물리학과 수업을 청강하기엔 부담스러운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유사과학적 비유 없이, 수식의 공포 없이, 딱 그 중간 어딘가에서 “아, 이런 구조로 생겼구나”를 느낄 수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궁금했던 어린 시절의 저에게도, 지금의 저에게도, 잘 맞는 책이었습니다.
서지 정보
레너드 서스킨드, 아트 프리드먼 공저 / 『물리의 정석: 양자역학 편』 (The Theoretical Minimum: Quantum Mechanics)